Feb 19, 2024 | ETH 봄학기 시작
아침 8시 수업을 들으러 시내에 7시 40분쯤 도착했던 것 같다. 해도 늦게 떠서 살짝 우중충한 분위기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그동안 개강만을 기다렸기에 설레기는 했는데, 여유시간이 많이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아쉬웠다. 캠퍼스에 처음으로 관광이 아니라 진짜 수업을 들으러 가는길이어서 기분이 묘했다.
첫 수업은 ETH HG (ETH 메인 빌딩)에서 진행했는데, 표지판이 없는데다가 0.5 층도 있어서 강의실을 찾아가기 상당히 어려웠다. 캠퍼스 곳곳에 조각상도 많고 건물이 너무 아름답게 설계되어서 어딜 가든 황홀한 느낌이었다. 코로나 2년에 군대 2년을 다녀오고 정식 대면으로 처음 듣는 강의었는데, 해외에서 영어로 수업을 듣자니 여간 긴장이 되긴 했다.
음 첫 수업 후기는 썩 좋지 않다. 4시간 수업인데, 첫 1시간 동안 수업을 하고 나머지 3시간 동안은 과제를 풀어서 내라는 형식이었다. (과제는 수요일 아침 8시까지 제출) 그런데 수업시간에 보여준것이라고는 이런 개념이 있어요 하는 몇몇 용어 설명과 조교 본인이 짜둔 코드가 잘 돌아가는지 확인만 시켜준다. 심지어 코드를 제대로 보여주거나 해석해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하는 말이 본인은 간단히 개요만 보여준것이기에 과제를 풀이하려면 구글링을 하고, 위키를 찾아보고, 챗GPT 를 써서 하라는 것이다. (이럴거면 수업을 왜해?) 나중에 과제를 풀면서 느꼈는데, 수업시간에 언급조차 안한 개념과 코드를 써야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 심지어 피드백 결과도 점수만 알려주고 모범 답안도 알려주지 않는다. 여기 박사는 정말 날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TH 수업이 전반적으로 이렇다면 정말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중에 현지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유독 이 수업만 이렇다고 했다. 나머지 수업에서는 설명을 대충 하긴 해도 필요한 개념 정도는 알려준다. 아무튼 RSL 연구실 수업이어서, 보스턴 다이나믹스와 쌍두마차를 달리는 RSL 랩에서 만든 유명한 사족보행 로봇인 ANYmal 을 눈으로 직접 본것은 신기했다.
ETH Edu 앱에서는 매주 수업 시간표를 확인할 수 있는데, (주별로 시간표가 다를수도 있음.) 사실 출석이 필수가 아니기 때문에 수업 시간이 겹쳐도 상관이 없다. 아무튼 내 첫주 시간표는 다음과 같고, 빈 시간에는 연구실에서 프로젝트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옆집 형 시간표인데 이 표현이 진짜 웃겼다. 헤르미온느 육성 학교라니 ㅋㅋㅋ (어떻게 수업을 4개까지 겹강으로 만들지?)
캠퍼스에서 열심히 수업 듣는 사람들도 많고, 수업에 참석하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는 사람들도 은근히 많은 것 같았다. 역사와 전통이 가득한 아인슈타인의 모교에서 수업을 듣는다는 사실이 영광이고, 남은 학기동안 알차게 공부도 하고 연구도 하면서 보내보려 한다.
그나저나 다른 친구들은 한주 전쯤에 우체국에서 우편이 와서 택배를 받으러 갔는데, 나는 엄마가 그 전에 택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연락도 없고 우편도 받은게 없었다. 수업 사이에 우체국에 찾아가서 내 택배의 행방에 대해 물어봤는데 다행히 도착은 한것 같다. 왜 안알려줘. 집 근처에 있는 우체국 사무실로 택배를 맡겨놨다고 해서 저녁쯤 돼서 택배를 받으러 갔다.
택배를 하나 가져오니 나머지 택배 하나는 기숙사 안으로 잘 배송되어 있었다. 왜 안알려줘. 방에 들어와서 드디어 옷가지와 음식을 받을 수 있겠거니 하고 좋아했는데, 막상 열어보니 너무 많은 양에 기겁해버렸다. 박스 하나에는 옷과 각종 생활용품이 들어있었고, 나머지 박스 하나에는 먹을것만 들어 있었는데 양이 상상초월이어서 내 책장은 음식이 점령해버렸다. 다행히 한국 돌아갈 때까지는 한식을 먹고싶을 때 요리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택배 하나에 25 kg 가까이 됐는데, 다음에는 그냥 여기에서 사는게 더 저렴하고 편리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도 이렇게나 가득 싸서 보내준 엄마한테 고맙긴 하다.